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카모토 료마 (문단 편집) == 생애 == || [[파일:601px-Kikyō_mon.svg.png|width=100%]] || || '''{{{#fff 사카모토}}} [[가몬(일본)|{{{#fff 가문}}}]]''' || [[일본]] [[에도 막부]] 막말 시기에 활약한 인물로, 일본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대정봉환]] 관련 활약상이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뒤에 나오듯이 현재 일본에서도 인기가 매우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수께끼 인물의 생애가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에도 막부의 공식 문서에는 기록된 적이 한번도 없다. 료마는 [[도사 번]]에서 3대 호상에 드는 나름 유복한 상인 집안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하급 [[무사(역사)|무사]](武士)로 탈번한 [[낭인]] 출신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본격적으로 일본 정치에 관여한 시절은 료마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료마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측하는 자료가 전부이다 보니 그의 행적에는 군데군데 어디서 뭘 했는지 알 수 없는 공백이 있다. 지금의 료마의 모습은 훗날 [[소설]]과 [[드라마]]에서 작가들이 상상력으로 창작한 부분이 많은 것. 그래서 일각에선 뒤에 나오듯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과 이에 반박하는 의견이 동시에 나오기도 한다. 위로는 형과 세 명의 누나가 있었다. 형과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로 형의 아들이 5살 때 요절하자, 료마를 양자로 삼으려고 한 적이 있다. 귀여움을 잔뜩 받고 자란 탓에 어릴 때는 [[울보]], [[겁쟁이]]에 12살 때까지 [[야뇨증]]이 있었다고 한다. 셋째 누나 오토메가 오줌싸개 버릇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사카모토 집안은 대대로 사이다니야(才谷屋)라는 전당포, 주조업, 포목상을 하던 상인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증조할아버지대에 번에 사카모토라는 성씨를 쓰는 것을 허락받고 따로 분가해서 하급무사 자격을 얻었다.(아버지가 3대 당주) 사실상 돈을 주고 무사 계급을 산 셈이다. * 도사 번은 번의 성립 배경으로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의 신분적 차별이 매우 심했다. 조슈 번이라든지 사쓰마 번의 경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시 고쿠다카가 한 번 크게 삭감되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4~1/3으로 감봉되었으나 예전의 가신단을 그대로 유지해서 사족 비율이 높았다. 반면, 도사 번의 경우 한 때 시코쿠 섬을 거의 통일했던 [[쵸소카베]] 가문이 대대로 지배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쵸소카베 모리치카]]가 [[가이에키]]되고, 해당 지역에 연고가 없던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야마우치 가문이 다이묘로 새로 들어오면서 기존에 초소카베 가문을 섬기던 무사들은 하급 무사로 전락하고, 야마우치 가문과 함께 들어온 무사들이 실제로 지배층이 되었다. 또한 원래 초소카베 가문은 다른 다이묘들이 휘하 무사들을 본거지 성 근처에 조카마치에 모여살게 했던 것과는 달리 가신들이 각 지역에 흩어져서 살았으므로 도사 번의 하급무사들은 말만 무사 신분이지 그야말로 평민과 다름 없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카모토 집안처럼 돈 빌려주고 이자 놀이하고, 술과 옷감을 만들어 팔아서 돈 번 상인이 돈으로 양반 계급을 산 무사는 하급 무사한테도 쌍놈 소리 듣던 최하급 무사였다. 료마가 태어났을 때는 본가는 상급무사들을 상대로 대출 사업(돈 빌려주고 이자놀이)을 주로 했다. 아버지와 형은 신분은 하급무사여서 성의 경비와 보수 직을 맡았는데, 사무라이 공무원으로 일하고 받는 봉록은 낮았지만, 분가할 때 본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나눠받았고, 농지도 [[고쿠다카]] 100석 이상 가진 땅주인이어서 웬만한 상급무사들보다 훨씬 잘 살았다. 료마가 태어난 생가도 상급무사들이 살던 지역의 경계선에서 70미터에 있었고 21 X 75미터의 500평 크기의 큰 저택이었다. 료마는 어릴 적에 같은 동네에 살던 상급무사의 자제들한테 이지메를 당하며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무사로서의 삶보다는 상인으로서의 삶에 더 관심이 많았던 듯. 실제로도 [[에도]]로 상경하고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주식 회사 개념의 사설 함대인 해원대를 창설하고 [[사쓰마]]나 [[조슈]] 등에 군수물자를 팔기도 했는데 삿초동맹에서 중개인 자격으로 입회한 것은 그렇게 사쓰마와 조슈 양쪽 모두에게 인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학문보다는 [[검도]]에 빠져 검도의 사범이 되고자 했다. 12살 때 병약했던 어머니가 죽자 이 경험이 검술에 열중하게 했다는 분석이 있다. [[1853년]] 19살 때, 검술 수행을 위해 약 1년 동안 [[에도]]에서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유학해서 [[북진일도류]]의 검술과 나기나타 [[면허개전]]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북진일도류를 배웠는가 대해서는 훗날 역사학자 가운데 그 진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 에도에서 유학 중에 [[흑선내항]] 사건(1853)이 일어났고 에도에 파견나온 [[도사 번]]의 경비대 소속이었던 (졸병) 료마는 미국의 [[증기선]]을 목격했다. 이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집에 보낸 편지에는 현대어로 번안하면 '서양 오랑캐 놈들이 쳐들어 오면 칼로 목을 따고 귀국하겠습니다.' 라는 치기심 가득한 허세를 떨었다. 같은 해 12월 난학자이자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사숙(개인학원)에 입학해서 포술, 한학, 난학 등을 배웠다. 다음해 1854년 7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연로했던 아버지도 죽음을 맞이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서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와다 쇼료를 찾아가 서양에 대한 지식을 배운다. 이 사람은 [[존 만지로]]의 취조에 참석해서 주워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서양 정보책을 쓴 화가였다. 료마는 미국의 국력과 [[민주주의]] [[공화정]] 제도를 알고 충격을 먹고 "무사를 떠받드는 신분제 토대를 바꿔 일본이 거듭나지 않는 한, 미국과 싸워서 이길 턱이 없다."라는 글을 남긴다. 1856년 10월부터 약 2년 간 다시 에도에서 검도 유학을 했다. 1860년,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시작으로 이 시기는 [[존황양이]] 운동이 절정기였다. 도사 번에서도 하급 무사 출신인 [[다케치 한페이타]]가 200명의 하급무사들을 규합해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이라는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결사 모임을 조직했고(1861) 료마도 가맹한다. 이들은 친(親)도쿠가와 막부 성향의 공무합체파 도사 번의 참정 요시다 도요와 대립했고, 도요는 암살되었다. 그러나 료마는 사와무라 소노조와 함께 1862년 탈번하여 [[낭인]]이 되었다. 한편 1863년 교토에서 존황양이파가 쫓겨나는 정변이 발생하여 도사 번에서 존황양이파가 탄압당하고 [[다나카 신베에]]는 자살, 요시다 도요를 암살한 배후로 지목된 다케치 한페이타는 [[할복]]하였으며, [[오카다 이조]]는 도주하다 체포된 후 고문 끝에 자백하고 참수형당해 근왕당은 무너진다. 1862년 3월, [[시모노세키]]로 찾아가 [[시라이시]] 쇼타로를 방문하고, 에도 막부의 정사총재직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 [[후쿠이현|후쿠이]] 번주이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보좌역)로부터 소개장을 받아서[* 1차 사료: 마츠다이라 슌가쿠의 메이지 시기 서간문, 수신인 츠치카타 히로모토(土方久元=楠左衛門), 메이지19년(1886년) 12월 11일][* 슌가쿠가 기억하는 시계열에 혼선이 있고, 에치젠번 사료집에도 소개장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고 한다.] 그해 12월[* 카이슈의 일기(海舟日記)를 1차 사료로, 12월 9일설(다른 이름으로 등장)과 12월 29일설(료마의 이름이 처음 언급)이 대립하는 중인데, 29일은 늦어도 너무 늦다는 점에서, 마치다(2019)의 연구 및 마츠우라 레이(松浦玲, 2001)의 선행연구는 9일 가설을 지지하고 있다.][* 다만 카이슈의 일기장 자체가 비망록 성격을 띌 뿐더러, 사실관계가 틀린 기록도 많아서 취급에 주의를 요한다고 언급된다(마치다, 2019). 마츠우라 레이는 료마에 대한 다른 연구서(마츠우라, 2008)에서, "암만 정치적으로 천재였다고 손쳐도, 기록자로서의 카이슈는 개판(御粗末)이다."라고 불평하며, 지난 연구(마츠우라, 2001)에선 9일 가설을 밀었지만, 솔직히 사료적 한계가 크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막부군함 부교직 [[가쓰 가이슈]]를 만나 제자가 되어 증기선의 항해술을 배운다. 이때 막부 개화파인 가이슈를 암살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오히려 그의 사상에 감화를 받아 제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말을 둘러댄 사람은 가쓰 가이슈가 남긴 기록뿐이다. 료마가 가이슈를 암살할 동기나 이유가 전혀 없다. 하여간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 제일의 인물로 평가한 사람이 가쓰 가이슈로 그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하며 기뻐해 달라고 했다는것을 보면 료마가 가이슈에게 감화된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내막에는 가쓰 가이슈의 상소를 받아들인 에도 막부가 [[고베]]에 해군양성소의 설립하고자 그 설립자금 문제로 고민할 때, 사카모토 료마를 백업하는 [[도사 번]]의 금융 네트워크([[사채]]업자)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 소개장을 들고 찾아 온 그를 만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고 가이슈가 미국 방문 체험으로 깨달은 '일본도 통일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합중국]]·[[연방]]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덤으로 [[민주주의]], 자유민권) 사상을 배웠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1862년 분큐의 개혁[* 사츠마 국부 히사미츠가 교토의 천황계 세력과 입을 맞춰 막부에 요구한 개혁안. 간단히 내용을 추리면 i) 사츠마번의 오랜 친구이자 공무합체의 화신이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사면하고, 젊은 쇼군 후견인(섭정)으로 삼을 것; ii) [[히토츠바시파|히토츠바시 파벌]]의 핵심 인사였던 마츠다이라 슌가쿠를 사면하고, 신설할 정사총재직에 임명할 것; iii) 지방의 예산을 갉아먹는 산킨코타이 제도를 전폭적으로 약화시킬 것.] 이후 격동의 시기로, 다음해 8월 18일의 정변, [[시모노세키 전쟁]], [[금문의 변]]을 거쳐, 1864년 조슈번과 조율하기 위해 가이슈는 [[나가사키]]로 출장을 가게 되고 료마도 동행한다. 이윽고 가이슈는 정계에서 실각하고 [[고베]]의 해군양성소는 폐쇄. 료마는 [[사쓰마]]로 망명한다. 이즈음 [[나라사키 료]]와 결혼한다. [[사쓰마 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나 돈과 선박을 지원해주면 이제까지 중계 무역을 독점하는 에도 막부를 배제하고 사쓰마 번에게도 짭짤한 돈벌이가 되는 장사(밀무역)를 하겠다고 설득,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 해원대의 전신이 되는 무역회사 카메야마 사중(社中)을 설립한다.(1865) [[에조]] 지방([[홋카이도]])의 특산물 말린 [[다시마]]를 선박을 이용한 중계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1866년 서로 원수지간이나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같은 처지에 서게 된 사쓰마와 조슈를 중재하여 사쓰마-조슈 동맹([[삿초 동맹]])을 성립시켰다. 삿초 동맹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는 호위인 미요시 신조와 함께 야마시로 국 기이 군 후시미(현재의 교토시 후시미구 )의 테라다야 여관에 숙박 중 이었다. 이 두사람을 노리고 후시미 부교소의 포졸들이 습격한 사건이 테라다야 사건 또는 사카모토 료마 습격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나라사키 료]]의 도움으로 포졸들로부터 간신히 도주한 두사람은 근처 운하 창고에 숨었고, 거기서 미요시 신조가 사쓰마번 저택으로 달려가게 된다. 저택에 도착한 미요시에게 연락을 받은 사쓰마 번이 사카모토 료마를 보호해 사건은 종결된다. 이 사건으로 부상을 입은 사카모토 료마는 사이고 타카모리의 권유에 따라 자신의 아내 오료와 함께 사쓰마 번의 배를 타고 교토를 탈출해 사쓰마의 온천에 요양하러 간다. 고토 쇼지로와 [[대정봉환]]을 목표로 한 협력관계를 맺고 [[도사 번]]의 지원을 받아 1867년 일본 최초의 해운상사인 해원대를 창설한다. 그리고 암살 위협을 우려하여 '''사이다니 우메타로'''(才谷梅太郎)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게이오]] 원년에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이고 이사부로'''(西郷伊三郎)라는 또다른 가명을 쓴 기록도 있다. 대정봉환 한 달 후 료마는 은신처이던 '''[[오미야 사건|오미야라는 간장 가게에서 암살당했다]]'''. [[신센구미]]는 평생 료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대정봉환 후 막부의 중요 인물이 되어 정작 신센구미에서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누가 암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에노모토 미치아키의(막부 가신, 쓰시마 태수(쓰시마노카미)였기에 에노모토 쓰시마라고 불림)의 지령을 받아 도쿠가와 집안을 충직하게 떠받들던 세력이었던 [[미마와리구미]]의 수장, 사사키 다다사부로가 제비뽑기로 암살자를 결정하여 이마이 노부오에게 암살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반면 [[시바 료타로]]가 [[가쓰 가이슈]]의 일기를 부정확하게 인용하여 생긴 오해라는 반론도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정치적으로도 당시 기준 소위 깨어있는 성향을 띄었는데, 특히 서양 문물에 대해 굉장히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문화에서 서양문물이라 하면 료마 님 정도(?)라 하는 말이 있을 정도. 일본 최초로 해운회사(해원대, 海援隊)를 설립했다. 이 회사에 있던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가 해원대가 해산된 뒤 받은 지분으로 만든 회사가 다름 아닌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이다. 최초의 근대적 손해배상소송(일본 최초의 증기선 사고)을 걸기도 했다. 또 일본인 최초로 [[신혼여행]]을 갔다고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기록 상으로는 사츠마 번사이자 삿쵸동맹의 실질적 공헌자로 알려진 [[코마츠 타테와키]]가 최초(료마보다 10년 정도 먼저)라고 한다.] 배후 사정은 그리 낭만적인 것은 아니고, [[1866년]] 1월 23일 테라다야에서 암살 시도로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기리시마]]의 온천에서 3개월간 요양생활을 했던 것. 이 때 타카치호노미네 산에 올라 정상에 꽂혀있는 전설의 창인 아메노사카호코(天逆鉾)[* 일본 신화의 창세신 부부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혼돈을 휘저어 대지를 창조할 때 사용한 창이다. 이후 [[니니기]]가 쓰다가 창이 필요 없기를 기원하며 타카치호노미네 산의 정상에 꽂았다는 전승이 있다. 나라 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아무튼 해당 시기의 창은 료마가 도달했을 때에는 화산 폭발로 부러져서 이미 복제품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복제품도 최소 전국시대 유래니 유물은 유물이다. 원래의 창은 칼날 부분만 [[시마즈]] 가문이 수습해 아라타케 신사(荒武神社)에 봉헌했으나 지금은 행방불명이라는 모양.]를 뽑아보았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